Skip to content Skip to footer

성공회는 중용의 입장에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양극단을 포용하는 포괄적인 성격을 갖는 역사적이고 세계적인 교회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성공회는 ‘잉글랜드 교회’를 모교회로 하여 그 역사의 뿌리가 중세를 넘어 초대교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영국의 역사와 함께 복합적으로 성장해 온 교회입니다. 성공회를 잘 이해하고자 한다면, 2000년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공회의 기원

그리스도교의 역사에는 생성과 발전, 창조적인 분열이 다양하게 겹쳐있다. 그래서 저마다 이채로운 색깔과 전통을 지닌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가장 큰 분열은 1054년에 일어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분열이었다. 서방교회도 중세를 거치면서 16세기에 이르러 큰 분열을 겪는다.

종교개혁 사건이 그것이다. 이로써 원칙적으로 하나였던 서방교회는 천주교,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 등으로 분열되었다. 성공회는 이 분열의 이유와 역사를 잘 알고, 그 분열의 창조적인 의미와 더불어 분명한 한계를 늘 되새기는 교회이다.

성공회는 서방교회의 분열 사건인 종교개혁을 통해서 영국에서 개혁된 교회가 다양한 선교 활동을 통해서 세계에 확대된 교단이다. 

Oldest Nicene Creed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니케아신경 (6세기)

성공회(聖公會)라는 교단 명칭은 전통적인 신경인 니케아 신경과 사도신경에 나오는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Holy Catholic Church)에서 따와서 한자 문화권인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 쓰인다. 다른 나라에서는 ‘에피스코팔 처치’(Episcopal Church) 혹은 ‘앵글리칸 처치(Anglican Church)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성공회는 세계적으로 단일한 교단이다. 

이 세계 성공회를 ‘앵글리칸 커뮤니언’(the Anglican Communion)이라고 부른다. ‘친교’(communion)라는 말로 교단 이름을 정한 교회는 성공회 밖에 없다. 그리고 단일 교단으로서 세계 성공회는 서방교회에서 천주교 다음으로 교세가 크다. 그렇다고 성공회가 늘 그 기원을 16세기 영국의 종교개혁에서만 찾는 것은 아니다.

영국과 그 근처의 섬에는 일찍이 2-3세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두 갈래로 전해져 발전했다. 하나는 로마의 확장 전쟁으로 심어진 로마 그리스도교이고, 다른 하나는 북아프리카에 기원을 두고 전해진 브리튼, 혹은 켈틱 그리스도교이다. 그 뒤 6세기 로마 주교 교황 그레고리의 파송을 받은 캔터베리의 성 어거스틴 주교를 통해 좀 더 체계를 갖춘 교회로 발전한다. 이 세 뿌리와 원천이 영국과 인근 섬에서 독특한 신앙 전통과 기질을 형성했고, 이 때문에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에도 성공회는 다른 개신교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색깔을 갖게 되었다.

세계 성공회의 모체가 된 16세기 영국의 종교개혁은 정치와 종교가 복잡하게 뒤섞인 사건이다. 그래서 유럽 대륙에서 일어난 종교개혁과는 애초에 강조점이 좀 달랐다. 영국 교회는 무엇보다 로마 교회의 중앙집권적 통치에서 벗어나서 자율적인 ‘국민 교회’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것이 초대 그리스도교의 여러 교회들이 관계 맺는 바른 전통이라고 믿었다. 지금도 동방교회 내 대부분 교회들이 이런 전통을 지킨다.

또한, 하나인 국민 교회 안에서 다양한 신앙 관습과 신학적 입장을 서로 용인하는 교회를 마련하고자 했다. 다양성을 아우르면서 서로 일치하는 방법은 무엇보다 예배와 기도이다. 이런 이상 속에서 성경과 교회 전통을 바탕으로 마련된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는 성공회의 신앙과 신학, 그리고 실천을 아우르는 중요한 터전이다. 이런 관심과 전통이 이후 성공회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오늘날 성공회의 모습에도 여전히 흐르고 있다.

1562년 인쇄된 1559 공동기도서

성공회의 발전

서방 교회의 종교개혁에서는 그 시작부터 정치와 교회가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받았고, 이 관계는 신학과 교리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순탄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 다양한 신앙 경험과 신학을 포용하면서 발전했다. 중세 교회의 전통을 깊이 유지하면서도 루터와 칼뱅의 신학을 적극 수용했다.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는 이런 다양한 전통, 신학, 교리를 아우르는 방식을 신학 문서나 교리서가 아니라 예배에서 찾았다. 그가 대부분 집필한 ‘공동 기도서’는 아직도 성공회 전통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신학, 교리, 신앙 실천의 터전이다.

16세기 말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긴 통치 기간 동안 다양한 신앙 분파들은 ‘하나인 국민 교회’ 안에서 안정을 되찾았다.

Thomas Cranmer 캔터베리대주교

그러나 잉글랜드 교회 내에서 칼뱅주의에 기대어 “왕정 폐지와 주교제 폐지”로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던 청교도는 의회를 장악하고 왕정을 폐지했다. 이로써 잉글랜드는 잠시 청교도의 국가가 되었다. 현재까지 장로교의 중요한 신앙 문서로 꼽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1646년)은 영국 교회의 이러한 격동기에 나왔다.

그러나 청교도에게 권력을 위임했던 의회가 이들을 내쫓고 다시 왕정을 세우면서 잉글랜드 교회와 정치의 관계는 새로운 변화를 겪었다. 왕권의 명목은 유지하되 의회가 정치와 종교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한편, 스코틀랜드는 일찍이 칼뱅주의자들의 영향권 아래서 장로교를 국교로 삼았고, 주교제를 채택한 스코틀랜드 성공회는 소수 교파로 남게 되었다.

출발부터 다양한 신앙 전통이 혼재한 영국 교회는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중요한 세 가지 신앙 운동을 경험했다. 첫째는 사제 존 웨슬리(1703-1791)의 ‘복음주의 운동’이다. 웨슬리는 기도서에 따른 성찬례와 기도생활을 강조하는 동시에 개인의 신앙적 체험과 감동을 중요시했다. 둘째는 18세기 중엽 옥스퍼드 대학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이 주도한 ‘옥스퍼드 운동’이다. 이 운동은 세속 권위보다 교회와 성직의 권위가 더 신성하다고 주장했고 그리스도교 역사의 오랜 예배 전통을 회복하려 했다. 셋째, 18세기 이후의 산업 혁명이 드리운 부작용을 비판한 ‘그리스도교 사회주의 운동’이다.
이 운동은 복음이 말하는 하느님 나라의 질서가 반영된 사회에 대한 고민과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내적으로 다양한 신앙 운동을 겪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성공회는, 외적으로 세계 식민지 확장과 함께 전 세계에 퍼져 나갔다. 미국 식민지의 잉글랜드 성공회는 미국 독립 이후에 약화되고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영향을 받은 미국 성공회가 독립된 교파 교회로서 발전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을 향한 다양한 선교회의 활동으로 19세기 말에는 하나인 교단으로서 세계 성공회의 정체성과 일치를 고민해야 할 만큼 급속하고도 다양하게 퍼져나갔다.